Thursday, July 28, 2011

[위키리크스] "지상 35미터에서부터의 투쟁" (한글)

2011년 7월 28일 지상 35미터에서부터의 투쟁
원문 http://wlcentral.org/node/2087

Submitted by paragranum on Thu, 07/28/2011 - 01:36

올해 1월 6일, 한국의 한 여성이 85호라고 번호가 붙여진 크레인 위로 올라갔다. 지상 35미터가 되는 곳에서, 그녀는 최대 조선업체 중 하나인 한진중공업 (출처: Hanjin)에 의해 행해진 강제대량해고에 대항하는 전쟁을 선포하였다.
  
Image(출처: source)

BBC가 '외로운 한 명의 시위자' (출처: depicts) 라고 표현하였던 김진숙 씨는, 전국노동조합총연맹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인데, 부산은 한진 영도 조선소가 위치한 곳이다. 그녀는 크레인 위에서 고구마와 죽만으로 연명하고 있으며, 태양열 (휴대폰) 밧데리만이, 그녀가 의지하고 있는 소중하고 유일한 세상과의 의사소통 끈이다. 회사측은 크레인 주변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음식, 물, 전기의 공급을 중단하고자 수차례 시도하였고 (출처: attempted), 그때마다 사람들은 회사측의 시도들에 대해 결사적으로 항의해야 했다. 혹독한 폭염은 단지 만지기만 하여도 피부가 데일 정도로 크레인을 달구고 있다.  

200일이 지났다. 한진이 정부에게 공권력 사용을 요청하자,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그것은 85호 크레인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집회인 '희망버스'를 막기 위해, 경찰병력이 지원되는 것을 가리킨다. 2차 희망버스는 이미 매우 심각한 진압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는데, 이 때 시위집회자들을 해산시키고, 참가자들이 그들의 목적지인 85호 크레인에 다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최루액과 물대포로 무장했던 경찰과 한진측이 개별적으로 고용한 용역들로 인해, 시위는 전쟁터로 변했었다.   

Image
최루액을 발사하며 집회 참가자들이 85호 크레인으로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경찰병력 (출처: source)

전쟁은 치열해졌고, 지금도 더욱 치열해지고 있지만, 그녀는 더이상 '외로운 시위자'가 아니다.

한진 강제해고, 사법절차를 따르지 않는 불법 폭력,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짧은 역사

10년 전, 한진은 노조와 그 어떤 합의 노력도 없이, 650명의 노동자들을 대량해고시키고, 일방적으로 임금을 동결하였다. 회사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들의 집단교섭권을 부정하였고, 심지어는 노조 위원장이었던 김주익 씨를 포함한 20여명의 주요 인물들을 피해보상소송으로 고소하는 '법적 학대'를 자행하였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과 집들은 가압류 되었고, 이는 그들 가족들에게는 끔찍한 경제적 학대가 되었다. 곧이어, 많은 이들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김주익 씨는 집단교섭권을 요구하고 한진에 의한 폭력을 맹렬히 비난하며, 85호 크레인 위로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하였다. 한진측으로부터는 노조와 비폭력적 교섭을 갖고자 하는 그 어떤 진지한 의지의 신호도 얻지 못한 채, 지상 35 미터 크레인에서 129일 간의 절망적이고도 맹렬한 투쟁 끝에, 그는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년 후, 한진은 또 다시 400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동결함으로써,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박해를 반복했다. 대규모 해고에 대한 공식적인 이유는 '재정적 어려움'이었다. 하지만, 해고 직후, 한진을 지주회사로 가지고 있는 한진중공업홀딩스는 주주들에게 1,660만 US달러에 달하는 주식배당금을 지급하였고 (출처:16.6 million US$), 이는 '재정적 어려움'이라는 회사측 해고사유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으로, 대중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샀다.    

Image
회사의 폭력과 학대에 대한 분노와 반감을 소리쳐 외치고 있는 한진 영도조선소의 한 해고노동자. (출처: source)

한 보도에 의하면 (출처: report), 한진은 '억울함'을 호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현금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지분을 분배해주었다" 라는 억지주장을 몇차례나 펼쳤다. 한진 노동자들의 평균 소득은, 한국 3대 조선업체 노동자들의 평균 소득의 60% 밖에 달하지 않는데, 이를 두고 한진은 "우리 회사 근로자들이 너무 많은 임금을 받아서 가격경쟁력에 해가 되고 있다" 며 불평하고 있다.      

세계 4위 규모의 조선소 - 필리핀에 있는 한진 수빅 조선소와 인권침해

ImageSome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한진 조선소의 노동조건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는 시위를 벌렸다. 노동자들은 또한 필리핀 잠발레스에 있는 수빅으로 향하기 전, 한국 대사관과 마닐라에 있는 노동고용부를 방문하였다. 2011년 7월 3일. (출처: source)

"대부분의 산업재해들은 '자살'로 기록되고 있다"

한 보도에 (출처:report) 실린 통계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0년 사이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산업재해만도 3,000여 건에 달하며, 한진 수빅조선소에서 발생한 사망건수는 41건이 넘는다. 수빅조선소는 한진으로부터 직접고용된 직원이 단 한명도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모든 노동자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하청계약들을 통해 고용되는데, 그 복잡함이 하청고용 시스템의 잔인성을 숨겨주고 있다. 이러한 고용구조 속에서,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 책임들로부터 교묘히 빠져나가기가 대단히 쉬워졌는데, 이는 대부분 근로조건들과 최소임금에 관한 법적 책임들이다. 한국-필리핀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진의 부당행위를 다루기 위한 양국 노조간 협력을 발표한 어느 보도에 따르면 (출처:report), 산업재해들은 적절한 보상 지원을 회피하기 위해 '실종' 또는 '의문사'로 기록되고 있다.        

법적 허점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하청계약들 외에도, 한진은 6개월 주기의 정기적 해고를 시행함으로써 그 어떠한 민주적 노동조합의 설립도 적극적으로 막고 있다고 보도된 바 있는데 (출처:reported), 이는 필리핀 노동법에 따르면 고용주는 노동자를 반드시 직접고용 하여야 하며, 그러써 노동자의 법적 고용주로서의 전적인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한진은 회사의 부당행위와 인권침해를 비난하는 시위자들을 대할 때마다 항상 '법적정당성'을 강조해 왔다.    

"그들은 언제든 우리를 몽둥이로 때리고, 목을 조르고, 가위로 찔러요. 뺨을 때리고 욕설을 퍼붓는 일은 흔해요. 우리는 개처럼 살고 있어요."

약 2만명의 필리핀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으며, 조선소 내에 있는 감옥과 같은 숙소에서 지내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한 노동자는 고백하기를, 언젠가 그가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감독관에게 1일 휴가를 요청했을 때, '미친놈'이라고 불리며 심한 언어폭력을 당했다고 했다.
필리핀 노동자들의 한달 평균 소득은 한국 노동자들의 한달 평균 소득의 10분의 1에 불과하는데,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약 200 달러에 해당된다. 약 천명 정도는 한국인 노동자들이며, 나머지는 모두 필리핀 노동자들이다. 대부분의 감독관들은 한국인인데, 심한 인종차별주의로 악명이 높으며, 폭력과 언어폭력을 휘두르는데 서슴치 않는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임시직인 까닭에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어서, 민주적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진 회사측이 꺼려하는 노조 설립 계획에 참여하는 노동자는, 누구든지 쉽게 고용주에 의해 해고당할 수 있다.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다루기 위한 한진과 경찰간의 협력을 증명하는 유출물

한진은 해고노동자들의 시위에 대응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용역들을 고용했는데, 이들은 평화로운 연좌시위를 통해 복직 투쟁을 하기로 결정한 활동적인 노조위원들과 해고노동자들을 상대로 법에 저촉되는 폭력과 협박을 행사하였다. '희망버스'라는 이름이 붙혀진 일련의 대중집회를 포함하여, 노동조합들과의 대화를 단호히 거부하는 회사측에 항의하는 집회들이 있을 때마다, 용역들은 언제나 경찰과 '함께' 일해왔다

Image
'희망버스'는, 지지와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85호 크레인 주위에 모인,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여는 축제와도 같은 집회이다. 위 그림은 손문상 씨가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이다.

최근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자료에 의하면 (출처: material), 2차 희망버스가 있기 전, 회사와 경찰 사이에 협의가 있었으며, 경찰측으로부터 제공된 공문들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공문은 집회 참가자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의 업무를 돕기 위한 적절한 인력들을 고용할 것'을 한진측에 지시하고 있는데, 이는 딱 잘라 말하자면 '용역'을 가리킨다. 


김진숙 씨의 희망 : 살아서, 두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것

이 힘겨운 투쟁을 시작하게 된 이유와 목적들을 설명하는 한 편지에서 (출처: letter), 김진숙 씨는 그녀의 목표를 '내 스스로, 이번에는 살아서, 이 곳으로부터 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은 고 김주익 씨의 간절한 희망이었다' 라고 적었다. 그녀는, 85호 크레인을 절망의 상징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바꿀 것이며,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다고 적었다. 그것은 김진숙씨 혼자만의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울 통해 헌법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을 공격의 목표로 삼은, 한국 내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학대와 불법 폭력에 대해 같은 분노의 감정을 나누고 있는 모든 이들의 투쟁이다.
그녀는 더이상 외로운 한 명의 시위자가 아니다.     

보다 많은 영문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곳들

더 많은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For more images, visit here.

번역 자원봉사 @makeda2

[Wiki Leaks Central] "A Battle 115 ft Above The Ground: Background #hanjin 지상 35미터에서부터의 투쟁" (English + Korean)

2011-07-28 A Battle 115 ft Above The Ground: Background #hanjin

2011년 7월 28일 지상 35미터에서부터의 투쟁
Submitted by paragranum on Thu, 07/28/2011 - 01:36
On January 6th of this year, a woman in South Korea went up a jib crane numbered 85. Thirty-five meters (115 ft) above the ground, she declared a war against massive layoffs constantly carried out by one of major shipbuilding companies, Hanjin Heavy Industries and Construction(Hanjin)

올해 1월 6일, 한국의 한 여성이 85호라고 번호가 붙여진 크레인 위로 올라갔다. 지상 35미터가 되는 곳에서, 그녀는 최대 조선업체 중 하나인 한진중공업 (출처: Hanjin)에 의해 행해진 강제대량해고에 대항하는 전쟁을 선포하였다.
  
Image(출처: source)

The ‘lone protester’ Kim Jinsuk, as BBC depicts it, is the leader of the Korean Confederation of Trade Union’s Busan district, where Hanjin's Youngdo shipyard is located. She lives on baked sweet potatoes and porridge on the crane, relying on scarce and precious solar-powered electricity as the only line of communication between her and the world. The company has attempted several times to block food, water and electricity provided to many laid-off workers who have staged a sit-down demonstration around the crane, and people had to desperately protest the attempts every time. Scorching weather heats up the crane to the extent which one can get burned by simply touching it.

BBC가 '외로운 시위자' (출처: depicts) 라고 표현하였던 김진숙 씨는, 전국노동조합총연맹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인데, 부산은 한진 영도 조선소가 위치한 곳이다. 그녀는 크레인 위에서 고구마와 죽만으로 연명하고 있으며, 태양열 (휴대폰) 밧데리만이, 그녀가 의지하고 있는 소중하고 유일한 세상과의 의사소통 끈이다. 회사측은 크레인 주변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음식, 물, 전기의 공급을 중단하고자 수차례 시도하였고 (출처: attempted), 그때마다 사람들은 회사측의 시도들에 대해 결사적으로 항의해야 했다. 혹독한 폭염은 단지 만지기만 하여도 피부가 데일 정도로 크레인을 달구고 있다.  

Two hundred days have passed. The war got desperate, as Hanjin requested ‘governmental authority’ – that is, support of the police force in blocking the Hope Riders, a mass demonstration in which people around the country come to the 85th crane to show solidarity and support. The 2nd Hope Riders already suffered severe suppression, which became a battle by the police force along with Hanjin’s private thugs armed with teargas and water cannon to ‘disperse’ the demonstrators and prevent them from reaching the destination, the 85th crane.

200일이 지났다. 한진이 정부에게 공권력 사용을 요청하자,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그것은 85호 크레인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집회인 '희망버스'를 막기 위해, 경찰병력이 지원되는 것을 가리킨다. 2차 희망버스는 이미 매우 심각한 진압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는데, 이 때 시위집회자들을 해산시키고, 참가자들이 그들의 목적지인 85호 크레인에 다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최루액과 물대포로 무장했던 경찰과 한진측이 개별적으로 고용한 용역들로 인해, 시위는 전쟁터로 변했었다.
   

Image
Police force blocking the demonstrators from getting to the 85th crane, by spraying diluted teargas.(source)
최루액을 발사하며 집회 참가자들이 85호 크레인으로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경찰병력 (출처: source)

The war became desperate, and is getting more desperate, but she is not a ‘lone protester’ anymore.

전쟁은 치열해졌고, 지금도 더욱 치열해지고 있지만, 그녀는 더이상 '외로운 시위자'가 아니다.

Brief history of Hanjin's layoff, extrajudicial violence and the workers' fight for labor rights
한진 강제해고, 사법절차를 따르지 않는 불법 폭력,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짧은 역사


Ten years ago, Hanjin layed off 650 workers and carried out a unilateral wage-freeze, without a single effort to negotiate with its labor union. The company denied the workers’ the right to bargain collectively which is protected by Constitution, and went further to ‘judicial persecution’, as it filed a damage suit against 20 major figures in the labor union, including Kim Jooik, the leader. Consecutively, it put the workers’ wages and houses under provisional seizure, which became a brutal economic persecution against their families. Soon, a bunch of arrest warrants were issued. Kim Jooik, calling for the right to bargain collectively and denouncing Hanjin’s violence, went up to the 85th crane and started a protest. After desperate and hostile battles 115 ft above the ground for 129 days without getting any sign of Hanjin’s serious will on non-violent negotiation with its labor union, he committed suicide on the crane.

10년 전, 한진은 노조와 그 어떤 합의 노력도 없이, 650명의 노동자들을 대량해고시키고, 일방적으로 임금을 동결하였다. 회사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들의 집단교섭권을 부정하였고, 심지어는 노조 위원장이었던 김주익 씨를 포함한 20여명의 주요 인물들을 피해보상소송으로 고소하는 '법적 학대'를 자행하였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과 집들은 가압류 되었고, 이는 그들 가족들에게는 끔찍한 경제적 학대가 되었다. 곧이어, 많은 이들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김주익 씨는 집단교섭권을 요구하고 한진에 의한 폭력을 맹렬히 비난하며, 85호 크레인 위로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하였다. 한진측으로부터는 노조와 비폭력적 교섭을 갖고자 하는 그 어떤 진지한 의지의 신호도 얻지 못한 채, 지상 35 미터 크레인에서 129일 간의 절망적이고도 맹렬한 투쟁 끝에, 그는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Ten years later, Hanjin laid off 400 workers and carried out the same wage-freeze, persecution on labor rights. Its official reason for huge-scale layoff was ‘financial difficulties’. But slightly after the layoff, the Hanjin Heavy Industry Holdings, whose holding company is Hanjin, distributed stock dividends equivalent to 16.6 million US$ to its shareholders, which generated public outcry to the corporation's overt reversal of its own excuse for layoffs, the ‘financial difficulties’.

10년 후, 한진은 또 다시 400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동결함으로써,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박해를 반복했다. 대규모 해고에 대한 공식적인 이유는 '재정적 어려움'이었다. 하지만, 해고 직후, 한진을 지주회사로 가지고 있는 한진중공업홀딩스는 주주들에게 1,660만 US달러에 달하는 주식배당금을 지급하였고 (출처:16.6 million US$), 이는 '재정적 어려움'이라는 회사측 해고사유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으로, 대중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샀다.    


Image
A laid-off worker from Hanjin's Youngdo shipyard crying out his anger and resentment to the corporation's violence and persecution.(source)
회사의 폭력과 학대에 대한 분노와 반감을 소리쳐 외치고 있는 한진 영도조선소의 한 해고노동자. (출처: source)


Hanjin expressed ‘resentment’, according to one report, and put forth several absurd claims that “We distributed them stakes instead of money, because we lacked cash.” The average income of workers in Hanjin is only about 60% of that of the ‘Big 3’ shipping companies in South Korea, which made the company’s grumble that ‘its workers get paid so much that it harms the price competitiveness.’

한 보도에 의하면 (출처: report), 한진은 '억울함'을 호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현금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지분을 분배해주었다" 라는 억지주장을 몇차례나 펼쳤다. 한진 노동자들의 평균 소득은, 한국 3대 조선업체 노동자들의 평균 소득의 60% 밖에 달하지 않는데, 이를 두고 한진은 "우리 회사 근로자들이 너무 많은 임금을 받아서 가격경쟁력에 해가 되고 있다" 며 불평하고 있다.      


The Fourth Biggest Shipyard in the World - Hanjin's Subic Shipyard in the Philippines and Human Rights Abuse
세계 4위 규모의 조선소 - 필리핀에 있는 한진 수빅 조선소와 인권침해

ImageSome 500 workers protested alleged working conditions in the Hanjin Shipyard. The workers also went to the Korean Embassy and the Department of Labor and Employment in Manila before proceeding to Subic, Zambales, Philippines. On the 3rd of July, 2011.(source)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한진 조선소의 노동조건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는 시위를 벌렸다. 노동자들은 또한 필리핀 잠발레스에 있는 수빅으로 향하기 전, 한국 대사관과 마닐라에 있는 노동고용부를 방문하였다. 2011년 7월 3일. (출처: source)

"Most industrial accidents are recorded as 'suicide'"
"대부분의 산업재해들은 '자살'로 기록되고 있다"

According to the statistics released in a report, during 2007-2010, official records of industrial accidents contain over 5000 cases, and the number of total deaths is more than 41 in Hanjin's Subic shipyard.
Subic shipyard has been notorious for having no single employee that Hanjin directly employs; all workers are hired through web of subcontracts which hide the system's brutality in the complexity. In such a hiring structure, it becomes extremely easy to evade legal responsibilities of employers to their workers, mainly with regards to working conditions and minimum wage. According to a report that declares South Korea-Philippines joint efforts to deal with the Hanjin's misconduct in both countries, industrial accidents are recorded as 'disappearance' or 'suspicious death', to avoid providing proper compensation.

한 보도에 (출처:report) 실린 통계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0년 사이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산업재해만도 3,000여 건에 달하며, 한진 수빅조선소에서 발생한 사망건수는 41건이 넘는다. 수빅조선소는 한진으로부터 직접고용된 직원이 단 한명도 없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모든 노동자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하청계약들을 통해 고용되는데, 그 복잡함이 하청고용 시스템의 잔인성을 숨겨주고 있다. 이러한 고용구조 속에서,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 책임들로부터 교묘히 빠져나가기가 대단히 쉬워졌는데, 이는 대부분 근로조건들과 최소임금에 관한 법적 책임들이다. 한국-필리핀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진의 부당행위를 다루기 위한 양국 노조간 협력을 발표한 어느 보도에 따르면 (출처:report), 산업재해들은 적절한 보상 지원을 회피하기 위해 '실종' 또는 '의문사'로 기록되고 있다.        


Apart from the subcontracts fully exploiting legal loopholes, it was reported that Hanjin actively prevents any establishment of democratic labor unions by periodic layoff in a six month cycle, because according to the labor law of the Philippines, an employer must hire the worker directly and thus take full responsibility as the worker's legal employer. Hanjin has always emphasized its 'legality' whenever it confronts with demonstrators blaming the corporation's misconduct and human rights abuse.

법적 허점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하청계약들 외에도, 한진은 6개월 주기의 정기적 해고를 시행함으로써 그 어떠한 민주적 노동조합의 설립도 적극적으로 막고 있다고 보도된 바 있는데 (출처:reported), 이는 필리핀 노동법에 따르면 고용주는 노동자를 반드시 직접고용 하여야 하며, 그러써 노동자의 법적 고용주로서의 전적인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한진은 회사의 부당행위와 인권침해를 비난하는 시위자들을 대할 때마다 항상 '법적정당성'을 강조해 왔다.    


"They beat us with clubs, strangle us, stab us with scissors at any time. Slapping in the face and shouting abusive language is common. We live like dogs."

"그들은 언제든 우리를 몽둥이로 때리고, 목을 조르고, 가위로 찔러요. 뺨을 때리고 욕설을 퍼붓는 일은 흔해요. 우리는 개처럼 살고 있어요."


About 20,000 Philippine laborers work there, and they are forced to stay in the prison-like dormitories inside the shipyard. One worker confessed that he once told his supervisor that he wanted a day off to visit his hometown, which was followed by severe verbal abuse, calling him 'crazyshit'.
The average monthly income of Philippine workers are one tenth of that of South Korea, which is about 300 US$. About 1000 workers are South-Korean, and rest of them are Philippine workers. Most supervisors are South-Korean, who are infamous for their severe racism and wield violence and verbal abuse without any restraint. Trying to organize a democratic labor union is almost impossible, as most of the workers cannot be protected by labor laws due to their temporary positions, in which employers can easily fire any workers who engage in such plans that the corporation loathes.

약 2만명의 필리핀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으며, 조선소 내에 있는 감옥과 같은 숙소에서 지내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한 노동자는 고백하기를, 언젠가 그가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감독관에게 1일 휴가를 요청했을 때, '미친놈'이라고 불리며 심한 언어폭력을 당했다고 했다.
필리핀 노동자들의 한달 평균 소득은 한국 노동자들의 한달 평균 소득의 10분의 1에 불과하는데,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약 200 달러에 해당된다. 약 천명 정도는 한국인 노동자들이며, 나머지는 모두 필리핀 노동자들이다. 대부분의 감독관들은 한국인인데, 심한 인종차별주의로 악명이 높으며, 폭력과 언어폭력을 휘두르는데 서슴치 않는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임시직인 까닭에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어서, 민주적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진 회사측이 꺼려하는 노조 설립 계획에 참여하는 노동자는, 누구든지 쉽게 고용주에 의해 해고당할 수 있다.   


Leaked material prove the Hanjin-police joint plan in ‘dealing with’ the Hope Riders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다루기 위한 한진과 경찰간의 협력을 증명하는 유출물

Hanjin reacted to the protest of laid-off workers by hiring private thugs to engage in extrajudicial violence and intimidation against active members of the labor union and laid-off workers who have chosen to fight for reinstatement by peaceful sit-in protest. The thugs also have ‘worked with’ the police force whenever there are demonstrations protesting the firm refusal of the company to talk with its labor unions, including the serial mass demonstration entitled ‘the Hope Riders’.

한진은 해고노동자들의 시위에 대응하기 위해 개별적으로 용역들을 고용했는데, 이들은 평화로운 연좌시위를 통해 복직 투쟁을 하기로 결정한 활동적인 노조위원들과 해고노동자들을 상대로 법에 저촉되는 폭력과 협박을 행사하였다. '희망버스'라는 이름이 붙혀진 일련의 대중집회를 포함하여, 노동조합들과의 대화를 단호히 거부하는 회사측에 항의하는 집회들이 있을 때마다, 용역들은 언제나 경찰과 '함께' 일해왔다

"Let's Fly, the Hope Riders..." "Don't Cry, Jinsook Kim!!"
Image
"Layoff is a murder"                             "Withdraw the mass layoffs!"

The Hope Riders is a festival-like demonstration in which people around the country gather up to the 85th crane to show support and solidarity. The illustration is by Son Moonsang.
'희망버스'는, 지지와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85호 크레인 주위에 모인,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여는 축제와도 같은 집회이다. 위 그림은 손문상 씨가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이다.


Recently, material leaked out to the press, showing prior consultation between the company and the police before the 2nd Hope Riders, which generated shock because of the statements from the police. The material directed Hanjin to ‘hire proper people to aid the work of police’ in dispersing demonstrators, flatly indicating private thugs.
Furthermore, an arrest warrant was issued to Song Kyeong-dong, one of the most active people in organizing the Hope Riders, due to his role in planning the demonstration. Song is a poet renowned for his works denouncing the bleak reality of South Korea regarding the persecution of labor rights by corporations and governmental power. In a brief interview, he denounced the warrant that “the allegation that the Hope Riders is planned and conducted by several small ‘third party’ groups is just nonsense. People all over South Korea are voluntarily riding down to Busan purely to show their solidarity, in a completely non-violent manner.” The 3rd Hope Riders is planned for July 30th, this year.

최근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자료에 의하면 (출처: material), 2차 희망버스가 있기 전, 회사와 경찰 사이에 협의가 있었으며, 경찰측으로부터 제공된 공문들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공문은 집회 참가자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의 업무를 돕기 위한 적절한 인력들을 고용할 것'을 한진측에 지시하고 있는데, 이는 딱 잘라 말하자면 '용역'을 가리킨다. 


The Hope of Kim: to walk down the crane alive, on foot
김진숙 씨의 희망 : 살아서, 두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것

In a letter announcing the reasons and goals of her starting a heavy fight, Kim wrote that her goal is to “walk down from here by myself, this time alive, which was the desperate wish of the deceased Kim Jooik.” She wrote that she will change the 85th crane from the symbol of desperation to that of the hope, and she firmly believes she can achieve it. It’s not only just Kim's battle - it’s everyone’s battle who shares the same anger toward the abuse of labor rights in South Korea and extrajudicial violence aimed at the rights protected by the Constitution, through the Law of Assembly and Demonstration.
She is not a lone protester anymore.

이 힘겨운 투쟁을 시작하게 된 이유와 목적들을 설명하는 한 편지에서 (출처: letter), 김진숙 씨는 그녀의 목표를 '내 스스로, 이번에는 살아서, 이 곳으로부터 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은 고 김주익 씨의 간절한 희망이었다' 라고 적었다. 그녀는, 85호 크레인을 절망의 상징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바꿀 것이며,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다고 적었다. 그것은 김진숙씨 혼자만의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울 통해 헌법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을 공격의 목표로 삼은, 한국 내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학대와 불법 폭력에 대해 같은 분노의 감정을 나누고 있는 모든 이들의 투쟁이다.
그녀는 더이상 외로운 시위자가 아니다.     


For more information in English: 보다 많은 영문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곳들

더 많은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For more images, visit here.


번역 자원봉사 @makeda2

Sunday, July 24, 2011

[Hankyoreh] "Cheer Up, Grandpa Devils on the Crane!" (한글+영어)

http://hani.co.kr/arti/society/labor/488578.html
등록 : 20110722 14:09 | 수정 : 20110722 16:37
First posted July 22, 2011 14:09 | Last edited July 22, 2011 16:37 


"Cheer Up, Grandpa Devils on the Crane!" 


“크레인 위 마귀할아버지, 힘내세요~”
[하니Only] 허재현 기자 기자블로그 기자메일
Written by Jae-Hyeon Huh / Voluntary translation into English by Makeda (@makeda2)




» (왼쪽부터) 박성호 박영제 신동순 정홍형씨.
 (From left) Sungho Park, Youngje Park, Dongsoon Shin, Honghyeong Jung

오는 24일이면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고공 크레인 농성이 200일을 맞는다. 김 지도위원으로부터 10여m 아래, 크레인 난간에서 노숙하는 4명의 노동자들은 28일차 농성을 맞는다. 이들의 존재는 크게 알려진 내용이 없다. “김진숙 지도위원을 지켜야 한다”며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사람들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푸른색 작업복을 입고 있어 스머프라고 불리는 이들도 누군가의 존경하는 아버지, 누군가의 사랑하는 남편일 게다. 그리고 우리나라 조선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린 산업의 역군이었을 게다. 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건 21일 저녁 늦은 밤이었다.

July 24 is Jinsook Kim's 200th day protest on Crane #85 in the Yeongdo shipyard of Hanjin Heavy Industry and Construction (hereafter HHIC). She is on the direction committee of Korean Confederation of Trade Unions (KCTU). 10 meters below her are 4 more workers who have been sleeping in the open on the same crane for 28 days. Little is known about them; known merely as some people who decided not to leave the crane in order to protect Jinsook Kim.
Called "Smurfs" due to their blue uniform, they can also be someone's respected father and  beloved husband, not to mention being a pillar of industry that has elevated the Korean shipbuilding industry to the world standard. It was late at night on July 21 when I could hear their voice.

한여름, 크레인 위에서의 농성은 지옥에서의 생활과 같다. 30년 나이의 쇳덩이로 이뤄진 크레인은 녹이 많이 슬었다. 바람만 불면 쇳가루가 날아올라 폐를 위협한다. 30℃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달아오른 쇳덩이는 농성 노동자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목욕은 언감생심이다. 먹을 물을 하루 한번 올려주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장에 탈이 난 사람, 피부에 염증이 난 사람들이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한 채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The protest on the crane in the middle of summer is like living hell. The 30 year-old metal crane is so rusty that a little bit of wind can blow threatening metallic powder into their lungs. The blistering hot mass of iron baked in the temperature of 30 degrees Centigrade (86 degrees Fahrenheit) makes them feel suffocated. They can't dream taking a shower. Well, at least, they are give some water once a day. With gastrointestinal upset and skin irritation, and with no shower, they have continued the protest.  

"Grandpa Devils on Crane #85"

12년만에 복직했다가, 또... The Story of Sungho Park : Reinstated after 12 years, but again...

남해수산고등학교를 나온 박성호(50)씨는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의 전신)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다. 배 만드는 기술을 익힌 그에게 조선 기술자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그 때 부산에서는 배 만든다고 하면 알아줬거든요. 돈도 많이 벌 줄 알았고요.” 1982년 8월. 그는 열아홉의 나이에 조선기술자가 되는 데 성공했다. 날품팔이를 하며 홀로 7남매를 키운 박씨의 어머니의 눈가에는 주름진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고 했다. 박씨는 7남매의 막내였다.

Sungho Park, 50 years old, graduated from Namhae Fisheries High School, and his dream was to work for Korean Shipbuilding Public Corporation, which is now Hanjin Heavy Industry and Construction. For him, being a shipbuilding expert was the best job to have since he had learned how to do it. "At that time, a shipbuilder was well-respected in Busan. Everyone thought it was a well-paid job as well." At last in August 1982, he succeeded in becoming a shipbuilder at the age of 19. His mother, who had raised her 7 children alone as a day laborer, didn't know how to stop smiling, he recalled. He was the youngest.

박씨의 삶이 꼬이기 시작한 건 그가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입사한 지 10여년만인 1991년 8월 해고됐다. 1991년 한진중공업에는 박창수 당시 노조 위원장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어용노조였던 한진중공업 노조는 박 위원장이 당선되고 나서야 전국노동자협의회(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전신)에 가입했다. 박 위원장은 구속됐다. 그런데 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박 위원장은 1991년 5월 느닷없이 숨진 채 발견됐다. 백골단들은 안양병원에 안치돼 있던 그의 주검을 탈취해갔다. 그의 죽음은 끝내 의문에 부쳐지고 말았다.

Sungho Park's life started to get tangled after he became a member of a labor union. 10 years after he started his first job, he got fired in August 1991. In the same year of 1991, there was a suspicious death of the union leader of the day, Changsoo Park. Until he became an elected leader, the labor union of HHIC at that time had been company-supported, but the election led the union to join Korean Council for the Labor Unions (now, Korean Federation of Trade Unions). Then, the HHIC union leader Changsoo Park got arrested, only to be found dead in prison in sudden later in May 1991. Baekdoldan - the notorious, special riot police force in Korea in 1980s-1990s - took his laid-in-state body from Ahnyang Hospital. His death still remains suspicious.         

박성호씨는 박 위원장이 숨졌을 때 노동조합 교육선전부장이었다. 박씨가 보기에 박 위원장의 죽음은 타살이었다. 가만 있을 수 없었다. 파업 투쟁을 벌였다. 그러다 끝내 91년 해고되고 말았다. 불법 파업을 벌이고 업무를 방해했다는 죄로 6개월간 구속생활도 해야 했다. 출소 뒤 박씨는 ‘박창수 열사 추모사업회’를 만들었다. 1998년 12월부터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려고 국회 앞에서 420일동안 노숙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2000년 10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한 배경에는 박씨와 같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다 박씨는 2003년 12월 회사에 복직했다. 해고된 지 꼬박 12년 7개월만이었다. 2003년 10월17일 김주익 당시 노조 지회장이 타워크레인 위에서 자살하고, 곽재규씨가 같은 해 10월 30일 도크에 몸을 던져 얻어낸 성과물이었다.

Sungho Park was in charge of the Division of Education and Publicity when the union leader Changsoo Park died. He believed that the late union leader was killed, and he couldn't just stand by. He led a strike and was eventually fired in 1991. He was also imprisoned for 6 months on charge of illegal strikes and obstruction. After released from prison, he found The Changsoo Park Commemorative Committee. He also carried out a camp-out strike for 420 days from December 1998 in front of the National Assembly building. Only through the efforts of people like him, it was possible for Presidential Truth Commission on Suspicious Deaths to be established in October 2000.

하지만 박씨는 2011년 2월 또 해고됐다. 8년만이었다. 이번에는 말 그대로 ‘그냥’ 해고 됐다. 불법파업을 벌인 것도 아니었다. “동료들의 목숨과 바꿔서 얻은 복직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됐어요. 복직한 뒤로는 노동조합 활동도 조심스럽게 했었어요. 그런데 또 해고되고 말았네요. 김진숙 지도위원 복직을 위한 출근투쟁에 함께 한 게 죄라면 죄지요. (노동조합 활동하면 해고되던) 세상이 바뀐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박씨는 크레인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김 지도위원을 끝까지 지키고 싶다고 했다. 이제는 그게 삶의 목표가 되었다고 했다. 몸은 힘들지만 아이들이 박씨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 위로였다. “큰 애가 고등학교 1학년, 작은 애가 중학교 3학년이에요. 애들이 2차 희망버스 따라서 아빠 본다고 영도 조선소 앞까지 왔다가 경찰에 연행됐어요. 아이들이 상처받을까봐 걱정했는데 ‘그냥 세상에 단련되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고요.” 박씨의 가족들은 7월30일까지 김해 사원 아파트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모아 놓은 돈도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입니다.” 세 가족의 가장인 박씨의 속은 타들어 간다. 박씨의 피부 곳곳에는 스트레스성 염증이 생겼다.

However, Park was fired again in February 2011, this time with no reasons. There was no illegal strike by him. "I could be reinstated due to the deaths of my colleagues, but it came to nothing. After the reinstatement, I was very careful with union activities. But despite all caution, I was fired again. If there was a reason, it could only be participating in a sit-down strike for Jinsook Kim's reinstatement. I thought the world changed, but it didn't." He said that he can't leave Crane #85, and that he wants to protect Jinsook Kim to the end. It became another goal of his life. It's physically very challenging, but support from his children consoles him. "My oldest child is a high school freshman, and my second one is a 3rd grader at middle school. They were arrested by police in front of this shipyard when they came to see me along with the 2nd Bus of Hope protesters. I was very worried they might have got hurt, but they said they took it as part of getting used to this world." His family was notified to move out of the employees residence in Kimhae where they are living in by July 30. "We don't have any savings. We don't know how to survive from now on. I'm very worried." As a breadwinner, his heart screams in agony. There develop stress-related skin inflammations all over his body.     
 
» 21일 부산시 영도구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 앞 전경사진. 이 크레인 위에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과 네명의 노동자가 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조소영 피디
The Story of Youngje Park : Reinstated after 12 years, but again...
20년만에 복직했다가, 또... 

고 김주익씨와 곽재규씨 덕분에 한진중공업에 복직한 사람들은 총 16명이었다. 두 명의 노동자가 연달아 몸을 던져 해고에 항의한 끝에 한진중공업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주었다. 1986년 해고됐던 박영제(53)씨는 이 때 살아난 16명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꼬박 20년을 넘긴 뒤 2006년 1월1일에야 복직했다. 박씨는 1986년 당시 ‘여자 용접공’ 1호로 유명했던 김진숙씨와 노조를 만들려다 해고됐다. 겉으로 명시된 해고 사유는 ‘상사명령 불복종과 회사 명예 실추’였지만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에 민주노조를 만들려다 찍힌 죄였다.

A total of 16 people were indebted to the sacrifices of late Jooik Kim and Jaekyoo Kwahk for their reinstatements - they had given up their lives to protest against layoffs by Hanjin Heavy Industry and Construction (hereafter HHIC). After their deaths, the company granted laborers' requests. 53 year-old Youngje Park, having been fired in 1986, was one of those revived 16 people. He got reinstated on January 1, 2006 after 20 years. He had been fired in 1986 because he had tried to make a labor union with Jinsook Kim, the first woman welder in Korea. Apparently, the reason was "disobedience to orders of boss" and "tarnishing the public image of the company," yet it was obvious that he was 'a pain in the neck,' trying to make a democratic labor union under the ferocious military regime. He couldn't even be able to make a stand.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해보고 그렇게 20년이 흐른 뒤 2006년 복직했을 때는 정말 꿈만 같았다. 그러나 함께 해고됐던 김씨는 끝내 복직하지 못했다. 박씨는 “회사는 ‘김진숙만큼은 안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보상심의위원회는 2009년 11월 “김진숙의 해고는 부당하다”고 판정한 바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미안해서라도 열심히 일했어요. 복직한 뒤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일을 맡았습니다. 제가 감독한 배가 완성돼서 떠나갈 때, ‘조선 1번지’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은 대단했지요. 김 지도위원을 위해서라도 해고돼서는 안되었는데...” 그러나 그는 또 해고됐다. 이번엔 이유도 없었다. 선박조립파트에서 열심히 용접 일을 한 게 죄라면 죄였다. “2월14일 정리해고 명단 발표를 보는데 화가 나더라고요. 회사 경영이 어려워진 것도 아닌데 자기들 멋대로 사람을 다시 자르다니요.”

It was like a dream come true when he was reinstated after 20 years. However, Jinsook Kim, having been fired with him, wasn't allowed to come back to work. According to Park, the company said "No matter what happens, Jinsook Kim must not be reinstated!" (Later in November 2009, The Committee for Democratization Movement Activists' Honor Restoration and Compensation adjudged that dismissal of Jinsook Kim was unjustifiable.) "I worked really hard just because I felt so sorry to her," he said. "After coming back to work, I became a honorary supervisor of industrial safety. Whenever the ship I made left the shipyard, I felt a great proud of working for the number-one shipbuilding company. Considering Jinsook, I shouldn't have been fired..." Yet, he was fired again with no good reason. The only thing to be blamed was  working hard as a welder in the ship assembly division. "I got really upset when when I read the list of the people who would be laid-off on February 14. The financial situation of the company was good, but they decided to carry out massive redundancy lay-offs without any talk. It doesn't make any sense."


박씨는 요즘 죽은 김주익씨가 자꾸 떠오른다고 했다.
“곰같이 우직한 사람이었는데 농성하던 사람들에게 샤워하러간다고 해놓고는 타워크레인에 몰래 올라가더니 129일만에 죽어서 나왔어요. 그런데 김진숙 지도위원이 우리에게 귀띔도 안해주고 그 자리에 또 올라가 있고. 우리는 또 해고됐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가 살맛나는 세상은 언제나 오나요.” 고1과 고3이 된 딸 둘을 둔 가장인 50대의 늙은 노동자는 우리 사회가 원망스럽다.

Park said, recently the late Jooik Kim has flashed upon him.
"He was a very unpretentious person. He went up to the tower-crane #85 without anyone knowing after he told others that he would go taking a shower. He returned to us as a dead body in 129 days. Then, the director Jinsook Kim climbed up the very crane without telling us, and we got fired again. Until when do we have to live like this? When would the world for hard-working laborers come?" As the grey-haired father of 17 and 19 year-old daughters, and as the breadwinner of his family, Youngje Park feels bitter about the Korean society.   

2009년 쌍용자동차 해고자를 닮아가는 가정 
The Story of Dongsoon Shin : Resemblance to the SSangyong Families


신동순(50)씨는 1995년 8월22일 한진중공업에 입사했다. 서른 다섯의 다소 늦은 나이였다. 이전에 현대중공업에서 일했던 터라 그는 입사할 때부터 철판 절단 기술자였다. 철판 절단 기술을 개선시킨 공로로 회사는 신씨에게 97년 ‘개선 제안상’을 안기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크레인 운전 자격증까지 갖고 있었다. ‘열심히 일만 하면 잘리는 일은 없겠지.’ 신씨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50 year-old Dongsoon Shin entered HHIC on August 22, 1995, when he was 35 a little later than other people. From the beginning of employment, he worked as an expert in iron-plate cutting. He even won "Improvement Proposal Award" in 1997 for his contributions to the improvement of the iron-plate cutting technology. He also had a crane driver's license, which was very rare at that time. He was naive enough to think that he would never be fired if he just worked hard. 

“저도 이번에 해고됐어요. 인간적으로 회사 관리자들이 미워요. 선박 수주 못한 게 우리가 일 열심히 안한 탓인가요? 2003년 두 명의 노동자가 대량해고를 막으려다 죽었는데 그 일을 또 반복하고 있어요.” 역시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었던 신씨의 가슴에는 ‘증오의 꽃’이 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5년동안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왔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해고 됐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씨는 해고 될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가슴 속의 답답함은 그를 크레인 위로 올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윗 사람에게 잘 안보여서 잘린 건가. 아니면 3년 전 치매 걸린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려서 찾으러 다니느라 몇 번 조퇴한 것 때문에 그런가.”

"This time, I was fired, too. I feel hatred at the management. Couldn't the company win overseas contracts because we didn't work hard? In 2003, two of laborers died in process of stopping massive lay-offs, but the company is repeating the same action," said he. Loathe grew in him. If he had done something wrong, it could only have been his working hard. After all, he had been working hard for 15 years with never being late to work. He was fired, though. No matter how he tried, he couldn't think of any reason for the layoff. The frustration made him put himself on the crane. "I still don't know why. Was I fired because I didn't give a good impression to my boss? Or, was it because I left work early several times to search for my mother, who got Alzheimer's 3 years ago?"


신씨에게는 지금 군대에 가 있는 아들이 한명 있다. 이제 일병을 달았다. 해고 되면 아들의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 결국, 신씨의 부인 조아무개(46)씨가 지난 해 12월부터 휴대폰 제조업체에서 유리 액정을 만지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시급 4400원에 하루 12시간 근무. 김해 사원 아파트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던 이웃들은 ‘죽은 자’인 신씨 가족에게는 연락도 뚝 끊었다. 7월30일까지 집을 비우라는 회사의 통보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신씨 가족을 짓누른다.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의 가정은 2009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가정의 과거를 잔인하리만치 닮아가고 있다.


His son is serving in the army, and he is a first-class private. Fired, he worries how he can prepare for tuition for his son. Finally, his wife (46) has been making money by working for a cellphone manufacturing company and handling liquid crystal glass since last December. She makes 4,400 wons (around $4) per hour for working 12 hours a day. Their ever affectionate neighbors in the same apartment complex don't talk to them anymore for they are like 'dead people'. The notification  to eviction pressures Shin's family like a mass of lead. The families of the laid-off in HHIC frighteningly resemble those in Ssangyong Motor Company in the past.    

» “하나, 둘, 셋! 신동순 할아버지 힘내세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조합원의 아이들이 85크레인 중간에 올라있는 조합원을 응원하고 있다. 사진 조소영 피디

"One, two, three! Cheer up, Grandpa Dongsoon Shin!" cheer the children of the laid-off HHIC union members to spur up the strikers in the middle of the crane.


연대세력을 외부세력으로 부르는 사회 
The Story of Honghyong Jung : The Society Calling Solidarity 'Interference'

다시 외부세력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정부와 재계는 입을 맞춰 “외부세력 개입 안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한진중공업 문제에는 한진중공업 노사만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악명 높은 독재정권의 산물 ‘제3자 개입 금지법’이 떠오른다. 정홍형(49)씨는 그래서 답답하다. 그는 85호 크레인 밑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 4명중 유일한 외부세력이다. 정씨는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아니다.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조직부장이다. 한진중공업은 산별노조의 형태로 금속노조에 가입돼 있으니 금속노조는 한진중공업의 교섭 당사자이고 정씨는 엄밀히 말하면 외부세력이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를 ‘외부세력’이라고 부른다.

The controversies over external force arise again. The Korean government and business world have started to call at the top of their voice that "External force must not intervene." They claim that only the HHIC labor union is entitled to intervene. It reminds the public of the notorious "Ban on the 3rd-Party Intervention Act" - a product of the military government years ago. That is why Honghyeong Jung, 49 years old, feels frustrated. He is the only 'external force' of the four laborers protesting under Crane #85. He is not an employee of HHIC. He is the head of the Organization Division in Busan-Yangsan Branch of Korean Metal Workers' Union (KMWU). The HHIC labor union is affiliated with KMWU in form of a trade union, so KMWU is a party to negotiation. Thus, strictly speaking, Jung is not an external force. However, the world calls him 'an external force."

‘외부세력’이란 말은 “가진 사람들의 언어”라고 정씨는 주장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과 사람이 연대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우리 사회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끼리 서로 돕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이고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외부세력이란 말을 꺼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힘겹게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겁니다.” ‘연대’라는 말을 ‘개입’으로. ‘동지’라는 말을 ‘외부세력’으로 바꾸기 좋아하는 우리 사회는 정씨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알면서도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툭하면 우리를 빨갱이처럼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색깔을 덧씌워 고립시키려는 거죠. 하지만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내 주변의 노동자 이웃을 돕는 게 빨갱이라면 빨갱이가 되고 말겠습니다.” 정씨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무사귀환 할 때까지 절대 크레인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고1, 중3이 된 아들 둘이 일주일에 한번 씩 공장 앞을 찾아와 손을 흔들어주고 가는 것이 정씨에게는 큰 위안이다.

The expression "external force" is the language of the people with wealth and power, according to him. Jung said, "Isn't it natural for neglected people to seek solidarity in society? It is the most beautiful and necessary thing for socially weak laborers to help one another. Those who like to use the word "external force" must have never fought hard in their all lives." For people in the Korean society, which prefers the words such as 'intervention' and 'external force' to 'solidarity' and 'comrades', it may be hard to understand what Jung is trying to tell. Or, they might understand what he means but try to distort its true meaning. "There are people who often call us 'commies'. Intentionally, they want to color us to make us isolated. Nevertheless, if helping the labors in need around me makes me a commie, I am willing to be be called a commie", said Jung. Jung said he would never leave Crane #85 until Jinsook Kim can return home. The only consolation  to him for now is his two sons - one 16, the other 17 -, who visit the shipyard once a week to wave at him.


21일 밤은 여름 날씨 답지 않게 쌀쌀했다.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제법 오슬오슬했다. 저녁 8시 30분 문화제가 끝난 한참 뒤에도 한진중공업 앞 신도 브래뉴 아파트 앞 인도에는 시민 이십여명이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이곳을 찾는 서영섭 신부는 한참을 서성인 끝에 “내일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야 발을 떼었다. 어떤 이들은 익숙한 듯 밤샘 노숙을 준비했다.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처럼 유명인들도 있었고, 손을 꼭 붙잡고 인도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연인도 있었다. 이들의 모습을 30미터 높이의 85호 크레인이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에 ‘사람이 있다.’

The night on 21 was chilly for a summer night. The wind penetrating my jacket was quite shivery. Long after a festival-like protest ended at 8:30, there were around twenty citizens on the sidewalk in front of Shindo Branew Apartment across from the Hanjin shipyard. They were reluctant to leave the place. A catholic priest Youngseop Seo, who has visited there everyday, reluctantly walked away from the place, saying he would come back next day. Others got themselves ready for sleeping in the open as they got used to it. There were public figures like Junggil Kim, the former Minister of Government Administration and and Home Affairs, and was a couple sitting on the sidewalk holding hands. Silently looking over them was 30-meter high Crane #85, where was a person. 


부산/글·허재현 기자, 영상·사진 조소영 피디 catalunia@hani.co.kr
Busan
Wrritien by Jaehyeon Huh, the journalist
Video and photos by Soyoung Jo, the producer
Volunteering translation into English by @makeda2   

비해고 노동자들도 “집에 갈 수가 없다”
Even non-laid-off laborers said "We can't go home." 

21일 저녁 8시 30분. 부산시 청학동 봉학초등학교 앞 인도에서는 간단한 문화제가 열렸다. 백여명의 시민들이 네줄로 앉아 문화제에 참석했다. 군데 군데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와 비해고노동자들이 섞여 앉아 있었다. 인천에서 찾아온 대학생 십여명도 이날 함께 하고 있었다. “김진숙님. 힘내세요. 사랑합니다.”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면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오른 손을 흔들어 대었다. 문화제를 마친 시민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인근 신도브래뉴 아파트 단지 아래 상가 근처에 모여 노숙을 준비했다.


8:30 at night on 21. On the street next to Bonghak Elementary School in Chunghak-dong, Busan was a brief festival-like protest. Around 100 citizens participated in this festival sitting in 4 rows. Here and there, the Hanjin laid-off laborers and non-laid-off laborers in blue uniform were sitting together with citizens. 10 college students from Incheon also joined. "Cheer up, Jinsook Kim! We love you!" When the citizens shouted in one voice, Jinsook waved at them from far away like a little spot. Most of the participants returned home after the festival, but some remained to prepare for sleeping in the open, gathering around the nearby shops close to Shindo Branew Apartment Complex.  
홍성노(39)씨는 봉학 초등학교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홍씨의 눈은 여전히 85호 크레인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다. 다행히 지난 2월 발표된 해고의 칼바람을 피한 비해고자였다. 해고 노동자들은 홍씨 같은 사람들을 ‘산 자’라고 불렀다.
“저 아래 네 명의 사람들이 더 있어요.” 홍씨가 입을 열었다. 김 지도위원이 농성을 벌이는 크레인 아래에는 네명의 노동자들이 함께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지난 6월 27일 파업농성장에 법원 집행관이 투입돼 농성자들이 강제 해산당할 때 끝까지 크레인을 지키며 공장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성호형은 잘릴 사람이 아니에요. 2003년 12월에 복직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성실하게 일만 했었어요. 엔진을 조립하는 형 손에는 기름 때가 늘 묻어 있었어요. 형은 딴 생각하기 싫다면서 일에만 파묻혔어요. 그런데 형은 죽었고(잘렸고), 그 옆에서 일하던 저는 살았어요.(안잘렸어요) 제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집에 못가겠어요.”


Sungnoh Hong, 39-year-old, couldn't leave the place near Bonghak Elementary School. His eyes were still focused on the crane. He is a laborer of Hanjin Heavy Industry and Construction. Fortunately, he could scarcely keep off the layoffs of last February. Laid-off laborers call people like him 'living ones.'
"There are four more people under the crane," he said. Under the crane where Jinsook Kim is holding a protest, there were four more laborers protesting with her. Those were the ones who hadn't left the shipyard to protect the crane when bailiffs had come to disperse the strikers by force on June 27.
"Sungho is not a person to be laid-off. He's always been working very diligently since he got reinstated in December 2003. His hands were always stained with oil because he assembled engines. Not to think of anything else, he concentrated in working. But, he got killed (meaning, fired), and I'm alive (meaning, still hired). How could I feel comfortable? I just can't go home."
   
홍씨는 크레인 아래에서 여전히 농성을 벌이고 있는 박성호(50·한진중공업 해고자)씨의 직장후배였다. 박씨의 밑에서 엔진조립 일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한달 가까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회사 앞에서 노숙을 하며 박씨를 지켜보고 있었다. 홍씨의 턱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다. 쌀쌀한 저녁 바람이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노용준(57)씨도 비해고자이지만 집회에 참석했다. “2003년 (김)주익이가 목매 죽었을 때 나는 그걸 그대로 본 사람이라요. 근데 저 자리에 또 김진숙씨가 올라가 있지 않습니까. 아이고. 내가 뭐라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그는 끝내 담배 한대를 꺼내 물었다. 반백발이 되어서 정리해고를 피한 노씨의 눈가에는 안도보다 회한이 가득해 보였다.


Hong was a junior colleague of Sungho Park (50), who has been protesting under the crane. He said that he had learned the engine assembly skills from Sungho Park. He's been watching Park, sleeping on the street for a month, without going back to his house. Now he got a thick beard. A chilly evening breeze grazed his sweaty hair.
Being a non-laid-off laborer, Yongjoon Noh (57) also participated in the protest. "When Jooik Kim hung himself in 2003, I saw his body with my own eyes. Then Jinsook Kim is on the very same crane. I really don't know what to say." At last, he took out a cigarette and lit it. This  gray-haired laborer managed to survive from the layoff, yet his eyes were filled with sorrow rather than relief.  


Written by Jaehyun Huh / 허재현 기자
Volunteering translation into English by @makeda2 

Followers

About Me

My photo
Linguistics, ABD / Educated in the U.S. / Phonology / 떠도는 인생 / 모순적인 삶 / 불편한 진실